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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형 AI와 AI 에이전트의 확산은 디지털 격차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한다. 지금까지 디지털 격차는 시민이 기술에 얼마나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AI가 행정 전반으로 확산되는 시대에는 또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과연 모든 행정기관은 AI를 활용해 시민의 문제를 동일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가. 이제 디지털 격차는 시민의 역량 차이를 넘어,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의 데이터·조직·기술 역량 차이로 확장되고 있다. AI 시대 공공서비스의 새로운 불균형을 살펴본다.
디지털 격차는 오랫동안 시민이 정보통신기술에 접근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논의되어 왔다. 그동안의 흐름은 단순한 인터넷 접속 여부를 넘어, 디지털 기기 보유와 활용 역량, 나아가 이를 삶의 질로 전환하는 능력의 차이에 집중해 왔다. 누가 더 성능 좋은 AI 도구를 선점하고, 누가 더 능숙하게 질문을 던지며, 누가 그 결과물을 자신의 학습과 노동·소득의 이점으로 치환할 것인가 하는 ‘개인의 역량’이 주요한 쟁점이 된 것이다.
하지만 행정의 영역에서 디지털 격차를 시민 개인의 접근성과 활용 역량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행정서비스는 시민이 자유롭게 선택해 구매하는 시장의 서비스가 아니라, 권리의 실현과 의무의 이행을 위해 누구든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공적인 접점이기 때문이다. 출생신고에서부터 복지급여, 인허가, 세금, 증명발급, 고충민원 등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다양한 행정서비스는 시민이 다른 공급자를 선택하기 어렵다. 따라서 AI 시대 행정의 디지털 격차는 시민 개인의 역량 격차를 넘어, 행정기관이 AI를 도입하고 운용할 수 있는 데이터, 예산, 조직 역량의 차이, 즉 ‘공급자 차원의 격차’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현재 시도되고 있는 디지털 행정은 절차를 간소화하고 시민의 접근성을 높인다는 명분을 내걸지만, 실제로는 자원이 부족하거나 복합적 욕구를 가진 시민에게 도리어 스스로 절차를 해결해야 하는 부담을 안기기도 한다. 온라인 신청 창구가 열렸다고 해서 시민이 자신의 문제가 어떤 제도에 해당하는지, 어떤 서류를 준비해야 하는지, 어느 기관이 책임을 지는지 자동으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디지털 전환의 성패는 단지 ‘서비스가 온라인화되었는가’라기 보다 행정기관이 시민의 문제를 얼마나 이해 가능하고 처리가 쉬운 형태로 바꾸어 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1) 1) 세계은행은 AI 활용을 위해 ‘4C’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4C는 연결성(connectivity: 에너지, 디지털 인프라), 컴퓨팅(compute: AI 칩,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컴퓨팅), 맥락(context: 데이터, 특히 지역, 언어, 사회적 맥락에 맞는 데이터), 역량(competency: 디지털, AI 활용 기술)을 의미한다. 이는 AI가 단순히 도구 하나를 도입한다고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데이터와 역량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사회적, 행정적 효과를 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World Bank. 2025. Digital Progress and Trends Report 2025: Strengthening AI Foundations. Washington, DC: World Bank.
AI 이전의 디지털 행정과 AI 이후의 행정이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자정부로 대표되는 기존의 디지털 행정은 주로 행정절차의 온라인화에 가까웠다. 시민은 창구 대신 포털에 접속하고, 종이서류 대신 전자문서를 제출하며, 처리상태를 온라인으로 조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기술은 대체로 행정서비스의 ‘통로’를 바꾸는 역할에 머물렀다. 반면 AI 이후의 행정은 단순한 접수 경로의 변화가 아니라, 민원 내용의 해석, 담당 부서의 분류, 유사 사례의 검색, 답변 초안 작성, 나아가 판단 근거의 제시에 이르는 행정 내부의 인지적 과정을 보조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AI 행정의 쟁점은 온라인 신청이 가능한가를 벗어나, 행정기관이 시민의 문제를 얼마나 지능적으로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는가로 이동한다.
문제는 이러한 기반과 역량이 모든 행정기관에 균등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 광역지자체의 AI 추진 현황을 보면, 지방정부가 AI 도입에 소극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서울시는 「서울시 인공지능 행정 추진계획」을 발표하면서 AI 행정기반, AI 이용환경, AI 행정혁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행정서비스 내부망에 자체 LLM을 도입하고 시민용 챗봇 ‘서울톡’에도 생성형 AI를 적용하는 등 AI 행정지원 체계를 고도화하고 있다.2)
서울시는 기존 챗봇이 정해진 규칙과 검색 기반 응답에 머물러 복합 질의에 한계가 있었다고 보고, 생성형 AI 기반의 보다 유연한 행정지원 체계로 전환하려 하고 있다. 경기도는 개별 AI 서비스를 산발적으로 도입하는 대신 AI 전담조직, 데이터센터, 생성형 AI 플랫폼, 도민서비스, 산업 클러스터를 함께 추진하여 AI가 행정의 조직과 예산의 구조 안으로 끌어들이는 특성을 보인다.3)
이 밖에도 전북특별자치도는 AI 행정의 실질적인 사용과 확산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전북이 자체 구축한 생성형 AI 시스템은 정식 운영 3개월 만에 누적 질문 10만 7,000건, 전체 사용률 65%, 본청 사용률 90%를 기록한 것이다.4) 공무원 업무 지원형 AI가 실제 행정 현장에서 빠르게 일상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부산의 경우 AI 도시전략과 투자 규모가 눈에 띄는 사례로 글로벌 AI 허브도시를 목표로 산업, 시민, 행정, 인재라는 4대 플래그십 프로젝트와 AI 장비 공동이용센터, AI 스마트시티, 동남권 AI 허브 등 5대 인프라 구축을 계획하고 있다.5)
2) 행정 분야 자체 LLM 도입… ‘글로벌 AI 행정도시’ 시동 건다, 서울특별시 디지털 서울 소식, 2025년 8월 11일
3) 경기도, AI클러스터, AI데이터센터, AI혁신행정에 1천억 집중투자, 경기도 뉴스포털 2025년 2월 9일
4) 전북도 생성형 AI, 3개월 만에 10만 건 돌파… 14개 시군 확대 추진, 전북특별자치도 뉴스룸 2026년 3월 23일
5) 부산시, 글로벌 인공지능(AI) 허브도시 부산 실현을 위한 「부산 인공지능(AI) 종합전략」 발표, 부산광역시 보도자료 2025년 3월 13일
| 표 1 | AI 행정 유형 예시
이와 같은 시도들은 지방정부가 이미 AI를 정책 의제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AI 도입의 여부가 아니라 그 방향과 깊이다. 현재 지방정부의 AI는 산업육성, 인프라 구축, 공무원 업무지원, 민원상담과 안내에 주로 결합되고 있다. 반면 법적 판단과 권리구제를 수반하는 복합민원 영역으로의 확산은 제한적이다. 결국 AI가 접목된 공공서비스 제공의 성과는 과거 전자정부 시절의 통로 격차를 넘어, 행정서비스의 해석, 분류, 응답 역량 차이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어떤 기관은 AI를 통해 민원을 빠르게 분류하고 답변 초안을 작성하여 시민의 시간을 아껴주지만, 다른 기관의 시민은 여전히 서류를 찾아 헤매고 반복적인 설명을 요구받는다. 이는 기술 수준의 차이가 아닌 시민이 공적 자원을 향유하는 방식의 차이이며 권리 접근성의 격차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AI는 행정서비스 전반으로 곧바로 확산되지 못하는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복잡다단한 행정민원의 성격에 있다. 민원에는 정보제공, 서류 안내, 증명발급과 더불어 인허가, 등록, 권리구제, 불이익 판단처럼 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행위가 포함된다. 따라서 단순 질의나 서류 안내는 AI 챗봇과 비교적 쉽게 결합될 수 있지만, 법정민원이나 고충민원은 개별 사정, 법적 근거, 설명책임, 불복 가능성, 재량 판단이 중요하기 때문에 AI가 곧바로 대체하거나 자동화하기 어렵다.
행정조직이 AI 도입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간 서비스에서 잘못된 추천이 불편이나 손실을 낳는다면, 행정에서의 잘못된 판단은 급여 탈락, 인허가 거부, 권리 침해, 불복절차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행정 데이터는 개인정보, 비공개 정보, 기관별로 분산된 기록과 연결되어 있다. AI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충분한 데이터가 필요하지만, 행정 데이터는 함부로 통합하거나 학습에 활용하기 어렵다. 설명가능성과 책임성의 문제도 남는다. AI가 제안한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누가 그 이유를 설명하고, 누가 시민에게 책임질 것인가? 이러한 질문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AI를 민원 판단의 핵심 영역까지 곧바로 확장하기는 어렵다.
이 지점에서 시민들이 일상에서 체감하는 민간 AI 서비스와 공공 AI 서비스의 간극이 행정 신뢰의 새로운 변수로 등장한다. 이미 많은 시민은 ChatGPT와 같은 고성능 생성형 AI를 통해 즉각적이고 유연한 응답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경험을 기준으로 보면, 규칙 기반 응답이나 초기 안내형 챗봇 수준에 머무는 공공 AI 서비스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공공부문은 보안, 개인정보, 법적 책임이라는 엄격한 조건 때문에 민간보다 훨씬 신중한 도입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민은 그 제도적 제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공공서비스의 성능을 평가할 가능성이 크다. “민간 기업의 AI는 이만큼 하는데 왜 국가 시스템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라는 질문은 디지털 행정에 대한 시민의 신뢰를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
비단 AI가 복합민원 영역에 늦게 도달하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장기적으로 AI가 법정민원이나 고충민원의 판단 보조 단계까지 진입할 경우,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위험도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그중 하나는 알고리즘 편향의 문제이다. AI가 과거의 편향된 처리 관행이나 특정 계층에 유리하게 축적된 데이터를 학습한다면, 기술은 공정성을 담보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취약계층의 민원을 불리하게 해석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특히 복합적 욕구를 가진 시민일수록 AI가 처리하기 쉬운 정형 민원보다는 비정형적이고 맥락 의존적인 민원을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이때 AI가 그러한 복잡성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면, 행정적 도움이 가장 절실한 시민이 가장 먼저 소외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따라서 AI 행정의 실현은 효율성을 기본 전제로 삼고, 공정성과 책임성을 함께 포함할 필요가 있다.
미래의 행정은 인간 공무원을 AI로 완전히 대체하는 방향보다는 AI가 정형화된 업무를 신속하게 돕고 인간 공무원은 공감과 해석이 필요한 복합 업무에 더 깊이 개입하는 혼합형 행정으로 진화해야 한다. AI는 행정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지만, 동시에 표준화된 민원과 복합적 민원, 데이터 인프라가 풍부한 기관과 그렇지 못한 기관, 그리고 AI에 의해 잘 포착되는 시민과 행정적 사각지대에 놓인 시민 사이의 격차를 확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AI 시대 행정의 핵심 과제는 기술을 얼마나 빨리 도입하는가가 아니라, 기술의 혜택이 누구에게 먼저 도달하고 누구를 배제하는가를 세밀하게 관리하는 데 있다.
무엇보다 공급자 차원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중앙정부 차원의 공통 AI 기반 구축, 민원 데이터의 표준화, 기관별 AI 준비도 진단, 공무원의 AI 활용 역량 강화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동시에 알고리즘 편향을 검증할 제도적 장치와 시민에게 판단 근거를 설명할 수 있는 책임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AI가 단순 민원에는 빠르게 적용되지만 복합민원과 고충민원에는 늦게 적용된다면, 지방정부의 AI 전환은 공공서비스의 보편적 개선을 이루지 못하고, 되려 서비스 유형에 따라 현격한 품질의 격차를 낳을 수 있다. 따라서 행정의 과제는 AI 도입의 찬반을 넘어, 기술이 행정의 불균등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설계되도록 감시하고 조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산업과 기술 발전을 비롯하여 생활 전반에 적용되고 있는 AI는 도입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AI 이후의 행정이 누군가에게는 더 빠르고 편리한 서비스로, 누군가에게는 기술적 소외의 경험으로 갈라지지 않도록 하는 관리와 설계가 필요하다. 민원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공적 책임성을 유지하면서도, 인공지능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행정의 심장에 정교하게 이식하는 일은 지금 우리 행정이 당면한 가장 크고 어려운 디지털 도전이다. AI 행정은 결국 기술적 문제 그 자체가 아닌, 기술을 활용해 “어떤 사회적 정의를 구현할 것인가”라는 행정의 근본 철학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