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로운 행정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민원을 분류하며, 정책 수요를 예측한다. 최근에는 재난 위험을 사전에 감지하거나 복지 사각지대를 발굴하는 영역까지 그 활용 범위를 확장해 가는 분위기다. 그 결과 행정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를 확보하게 되었고, 의사결정의 속도 역시 한층 빨라졌다. 그러나 정보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중요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과연 행정은 데이터만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
행정 현장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같은 재난 문자라도 지역과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이유다. 어떤 마을은 문자를 받자마자 대피가 이뤄지지만, 고령 인구가 많은 어떤 지역은 전달 자체가 어렵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어도 평소 침수가 잦은 골목이 있고, 통계에선 확인할 수 없지만 이동이 어려운 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보는 대부분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오랜 시간 현장을 마주하며 축적된 판단과 직관 속에 존재한다.
누군가는 이를 ‘감’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학문적으로는 ‘암묵지(Tacit Knowledge)’라고 명명되는 개념이다.
암묵지는 문서나 매뉴얼로 완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경험과 직관, 노하우를 의미한다. 철학자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1)는 이를 두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We know more than we can tell)”고 표현한 바 있다. 실제로 많은 행정 현장에서 중요한 판단은 데이터뿐 아니라 이러한 암묵지에 의해 이뤄진다.
1) 헝가리 출신의 과학자이자 철학자. 지식은 단순히 문서와 언어로 전달되는 정보만이 아니라 경험과 직관, 기술에 내재된 형태로도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암묵지(Tacit Knowledge)’ 개념을 제시했다. 즉, 수치와 데이터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장의 경험과 감각 역시 중요한 지식임을 강조한 것이다.
AI는 명시된 정보를 학습하는 데 탁월하다. 법령과 규정, 과거 사례, 통계 자료를 분석해 최적의 결과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의 분위기와 주민들의 반응, 반복된 경험 속에서 축적된 직관까지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요소들은 대부분 데이터로 정형화되기 어려운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재난 대응 과정에서 AI는 강수량과 지형 정보를 분석해 침수 위험 지역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최근 공사로 인해 배수 환경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거동이 불편한 주민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구역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정보는 통계보다 현장 경험 속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AI는 평균을 설명하지만, 인간은 예외를 발견한다. 데이터는 패턴을 보여주지만, 현장의 경험은 그 패턴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찾아낸다. 특히 재난 대응과 복지, 고령자 서비스처럼 사람의 삶과 직접 연결되는 분야일수록 이러한 암묵지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 암묵지는 선택적으로 더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 행정이 시민의 삶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품어야 할 판단의 기반이다.
AI는 앞으로도 더 많은 정보를 분석하고, 더 빠른 판단을 제안할 것이다. 행정 역시 AI를 통해 반복 업무를 줄이고, 정책 수요를 예측하며, 보다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빠른 행정만은 아니다.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예외적인 조건까지 고려하며, 필요할 때 책임 있는 판단을 내리는 행정이다. 그래서 AI 시대에도 현장은 여전히 중요하다. 데이터는 세상의 흐름과 패턴을 설명할 수 있지만, 사람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데이터가 아니다. 통계와 시스템 밖에 놓인 사람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좋은 행정은 더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데이터를 사람의 삶과 연결하고, 현장의 맥락 속에서 해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현장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 있다. AI 시대의 행정이 놓쳐서는 안 될 것은 새로운 기술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 현장에서 축적된 경험과 판단의 힘이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누군가는 기상청 강수량부터 확인한다. 하지만 현장 담당자는 먼저 특정 마을을 떠올린다. “이 정도 비면 저 골목부터 물이 차겠는 걸?” 태풍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누군가는 재난 문자를 발송한다. 하지만 담당자는 “저 동네는 어르신이 많아서 직접 연락해야 해”라고.
이러한 판단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매뉴얼에도 없고, 데이터베이스에도 없다. 대신 오랜 시간 현장을 지켜보고 주민들을 만나며 자연스럽게 쌓인 경험 속에 존재한다.
이를 ‘암묵지(Tacit Knowledge)’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문제를 해결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지식이다. 어쩌면 암묵지는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현장을 오래 바라본 사람이 갖게 되는 작은 감각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 https://retailtalk.co.kr/RETAIL/?bmode=view&idx=15426111
⦁ https://ko.wikipedia.org/wiki/%EC%95%94%EB%AC%B5%EC%A0%81_%EC%A7%80%EC%8B%9D